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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 후 양 손에 수류탄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 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김구에게 전보를 보낸다.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 이날 거사를 진행한다는 말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혔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 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일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 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한국 독립항쟁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 성을 세계에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봉창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 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광복 후 귀국한 김 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봉창 의사의 옥중수기 1932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 이봉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