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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51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 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 견습으로 일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 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의사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 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건달처럼 살던 그,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다 1925년, 철도국을 그만둔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이야기 하 자 이봉창 의사는 자신의 조카딸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하며 여비를 받았고 그 일본인과 조카 이은 임 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이 후 일본인으로 살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했다. 20대 말에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 싫다는 이유 로 수시로 일을 그만뒀다. 결혼을 주선해 주겠다는 이야기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 니다가 1931년 상하이의 명선철공소에 입사했으나 임금이 너무 낮아 그곳도 그만둔다. 그 뒤 상하이에서 수소문 끝에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통신처 2층에서는 비밀회의를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사무실에서는 갑자기 허름한 일본 옷을 입고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나타 나자 긴장하고 있었다.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사람들은 그를 더욱 의심했다. 임정 요인들은 그 를 왜늙은이라 불렀다. 상해임정서 백범 면담 독립사상에 큰 감명 김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를 시켜 이봉창의 뒷조사를 하게 한다. 조사를 들은 김구는 이봉창이 단순히 건달이 아니라 생각하고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진다. 이 과정에서 이봉창 의사는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 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 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에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김구는 그가 일본으로의 출입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일왕 제거를 계획한다. 거사 준비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 로 일본 경찰과도 친분을 쌓고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