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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라도 지역을 포위한 뒤 수색망을 좁히며 의심이 가면 모조리 죽였 다. 일본군의 군복을 한복으로 변장하여 알아볼 수 없게 하는가 하면 통행금지를 위반한 민간 위 반자까지도 가차 없이 사살하였 다. 두 달여에 걸친 일본군의 무자 비한 공격에 의병들은 속수무책 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수많 은 의병들이 붙잡혀 현장이나 감 옥에서 처형당했다. 당시 전남경 찰서의 보고에 따르면 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420명 의 의병이 사망하였고 1,687명이 체포되거나 자수하였다. 심남일, 안규홍 등 26명의 의병장이 체포 되었고 103명의 의병장이 희생당하였다. 이 기간 중 일본 토벌대측은 사망자 136명, 부상자 277명에 그쳤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 17,779명, 부상자 376명, 포로 2,139명이었다. 한편,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한 안중근 의사는 초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침략의 원 흉으로 지목하여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와 열차 회담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 권총을 쏘아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이 일로 안중근 의사는 1910 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 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학살작전이 계속 이어짐 에 따라 국내에서의 활동은 보다 어려워졌 다. 의병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술을 펼치거나 항일투쟁의 근거지 마련을 위하 여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옮겨갔다. 1910년 연해주에서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의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공할 계획 2달여에 걸친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의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의병들이 붙잡혀 현장이나 감옥에서 처형당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초 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알 3발을 명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