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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구본웅 화백이 등굣길에 목격한 김상옥 의사와 일본경찰간의 총격전 장면 을 묘사한 그림. 구화백의 시화집 ‘허둔기’에 수록됐다. 귀국 목적은 암살단의 숙원인 종로경찰서 폭파에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주살에 있었다. 동지들과 작별할 때 의사는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 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서울에 온 뒤 옛 동지인 전우진 및 이혜수의 집에서 정설교, 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 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우선 필요한 것은 활동자금이었다. 이들은 항일문건과 독립항쟁자금영수 증, 인장 등을 제작하는 한편 거사용 폭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일경 4백여 명과 총격전 끝에 자결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의사는 종로경찰 서 서편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 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의 굉음은 마 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다. 김상옥 의사는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부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 다.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하 기 위해 서울역을 지날 때 저격을 계획했으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고 만다. 무장한 순사 21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했 지만, 김상옥 의사는 다무라(田村長七) 형사를 사살하고 이마세(今瀨金太郞) 경부와 우메다 (梅田新太郞) 경부보에게 중상을 입히고 남산 을 넘어 효제동 지인의 집에 숨었다. 하지만 그곳도 금방 발견되어 약 1천여 명 의 경찰과 헌병에게 포위되었고 김상옥 의사 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가옥의 지붕을 타고 넘으며 무장한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3시간의 전 투 끝에 16명 이상의 일경을 사살했으나 탄환이 다하고 말았다. 상해에서 말했던 것처럼 남은 한 발 의 권총을 머리에 대고 쏘아 스스로 자결, 순국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