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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야학에서 끝내지 않고 3권으로 구성된 「농 민독본」도 썼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만들어 농가부업장려와 공동판매, 공동구입을 위한 조합, 국 산품 애용, 생활 개선 등에 힘썼고 친목과 체력향상 등을 위한 활동도 함께 펼쳤다. 독립항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함흥수리조합에 소속된 일 본인이 조선인 3명을 살해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독립해야만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몇 달의 고민 끝에 윤봉길 의사는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다’라고 적은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윤봉길 의사의 고뇌는 중국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잘 적혀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 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채소 장사를 하며 독립을 앞당길 방법을 찾았 다. 상해에 도착한 지 1년이 넘은 1931년 겨울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고 본 인이 독립항쟁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했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 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거 행할 예정이다”라는 소식이 상해 일일신문에 보도된다. 임시정부는 이 행사에 참석하는 군 지휘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했다. 의거 3 일 전 윤봉길 의사는 이 의거가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인애국단 단원으로서 단장인 백범 김구 선생의 입회 아래 태극기 앞에서 선서했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 의사는 백범 선생과 마지막 아침을 먹 은 후 서로의 시계를 바꾸고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행사장 김구 선생과 함께한 윤봉길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