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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이후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했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일 때문에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지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대동공보 기자, 대동학교 학감, 한인민회 의 고문 등을 맡았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그를 사살할 준비 를 시작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자금 과 권총을 마련한 안중근 의 사는 10월 26일 새벽 역 안의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 다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회 담을 끝내고 러시아 의장대 를 사열하고 돌아가려는 순 간 안중근 의사의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졌다.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 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통역 관도 방청인도 전부 일본인으로 구성된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2 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의도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 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 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책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 론」을 완성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일제가 이를 무살해 1910년 3 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 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안중근 의사의 유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10일 뤼순감옥 면회실에서 면회 온 발렘신부를 바라보며 유언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