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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31 쟁가의 도움으로 8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신임 총독이 9월 2일에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남 대문역 부근에서 숙식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강우규 선생은 환영행사를 마치고 관저로 떠나 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거사에 성공하면 자작시를 읊으며 체포될 계획이었다. 하 지만 노령의 나이라 힘이 모자랐던 탓일까? 폭탄 은 마차에 도달하지 못하고 폭발했다. 현장에서 몸을 피한 선생은 도피 중 잡혀 수감됐다. 그는 옳은 일을 했기에 재판을 받는 동안 항상 당당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도 굽히지 않았던 독립항쟁 65세의 애국지사의 용기는 독립항쟁을 하는 이들에게 큰 감동과 존경심을 심어줬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경험 한 그는 청년들에게 독립을 안겨주고자 노력했으며 청년 들에게 독립의 꿈을 심어주기를 원했다. 11월 죽음을 앞두 고 청년들에게 남긴 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 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 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 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 되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 냐?”고 묻기에 선생은 한수의 시를 읊었다. “단두대상 유 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마지막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강우규 선생에게 대 한민국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강우규 선생 수형기록 카드 강우규 선생의 묘(국립현충원)와 묘(상단) 비석 하단부에 새겨진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