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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민긍호 의병장은 강원, 충청, 경상도 일대에서 10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 다. 을미의병 항쟁 시기에 의병을 일으켜 옥고를 치른 기삼연 의병진은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한 뒤 고창, 법성포, 광주, 나주 등지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일제 헌병보조 원이었던 강기동 의병장은 군대가 해산되자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의병들을 구출해냈다. 이후 양주 와 포천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연기우 의병장과 연합하여 일본군 공격에 나섰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하사였던 차도선 의병장은 홍범도, 태양욱 등과 의병을 일으켜 후치령, 삼수, 갑산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기습해오자, 부하 250여 명을 이 끌고 투항하였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한 뒤 다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유격전을 계속하 였다. 이후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옮긴 뒤 안중근 의사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대한제국군의 보병부교였던 채응언 의병장은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평안도와 강원도에서 의병활 동을 하며 일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7년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석상룡 의병장은 후에 남원·함양·산청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지리산을 거점으로 유 격전을 벌이다 양한규, 고제량 등과 연합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각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전국적 인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1907 년 12월 전국 곳곳에서 올라온 1만여 명 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울을 공략하여 통감부를 무너 뜨리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치 기 위하여 조직된 연합 의병부대 ‘13도 창 의군’이었다. ‘서울 진공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선발대가 동대문 밖 10여 km까 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다. 서울 진공 계획이 일본군에 누설되어 일제가 서울 외곽 방비에 만전을 기한데다 창의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허위에게 군권을 맡기고 급히 귀향한 것이다. 결국 일제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하면서 군대는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비록 13도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각 지역에서의 의병 항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허위는 임진강 유역으로 부대를 옮기고 김수민, 이은찬 등의 의병부대와 합쳐 지속적인 항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전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