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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27 을 받아들였고 감리교에 몸을 담은 후에는 당시의 양반 출신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인간 평등사상 도 받아들인다. 선생은 스무 살이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게도 존댓말을 썼고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집 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해 평민으로 만들었다. 특히 과부가 된 여동생의 거짓 부고를 낸 다음에 다 시 결혼시킨 일은 당시 유력가문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던 행동이다. 이회영 선생의 개방된 사상과 큰 인물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나타 났다. 선생의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당시 상황을 비추어보면 정말 위대한 선각 자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한 국내 계몽활동과 신민회 조직 이회영 선생은 21살 때 독립협회에 참가한다. 이상재, 이상설, 이범세, 서만순, 조한평, 여규형, 이 강연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 계몽, 신진 정치가 간의 협력, 내치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수습하려 힘썼다. 당시 계몽운동의 하나로 공옥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관이었던 이상설과 당시 외무부 교섭국장이었던 동생 이시 영과 함께 을사늑약 철회 운동을 벌였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선생은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동시에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항쟁계획을 추진했다. 1906년에 재산을 처분하고 노비를 해 방시킨 다음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그곳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한다. 하지만 이상설의 헤이 그 특사 파견과 일제의 방해로 서전서숙은 다음해 문을 닫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공옥학교에서의 인연으로 안창호, 신채호, 이시영 등과 함께 1907년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선생은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했다. 이 활동의 하나로 그해 11월에 사립경성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의 기반을 닦다 하지만 이런 활동으로도 조국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1910년 한일병탄의 국치를 당하자 이회영 선생은 국내에서의 명성을 포기하고 형 건영, 석영, 철영과 아우인 시영, 호영 등 일곱 형제 중에 6 명의 형제와 60여 명의 가족이 모두 만주로 떠난다. 선생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항쟁기반 닦기에 들어간다. 선생은 국내를 오가며 비밀리에 여러 인사와 접촉해 다양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중 하나가 광무황제 망명이다. 아들 이규 학이 광무황제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는 기회를 틈타 광무황제와 접촉했다. 그러나 실행만 남겨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