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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독립장│이회영(李會榮) 선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 적 사고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항쟁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선생을 독립항쟁가 또는 아나키스트 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신라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명문가 자손 이회영 선생은 1867년 서울 남산골(현 저동)에 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10대조는 임진 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 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다. 그 이 후 선생의 아버지인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 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냈 고 신라, 고려 시대에도 많은 문무 관료를 배출 한 손꼽히는 명문가다. 이회영 선생은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 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지만 일찍부터 개화사상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위대한 혁명가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서전서숙과 장훈학교를 설립해 계몽운동에 앞장섰 다. 일가족이 만주에 정착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한다. 항일구국연 맹에서 흑색공포단을 지휘해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였다. ● 1867년 3월 17일 서울 출생 ● 1907년 신민회 조직 ● 1911년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신흥강습소 설립 ● 1924년 재(在)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 1932년 11월 17일 뤼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 북경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회영 선생과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