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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25 지휘해 일제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일제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 독립군만으로도 대항이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독립군 최후의 맹장, 일본 밀정에 의해 최후를 마치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 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장군은 중국단체인 요녕농민자위단과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 듬해에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이 일제 에 잡히는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조선혁 명당은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총사령이 된 장 군은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본군과 2백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지리 를 잘 알고 있는 점을 이용해 한·중 연합작전 으로 영릉가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공군력이 없고 병력 부족 등으로 열세를 면하기 어 려웠다. 일제는 양세봉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한다.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했고 장군은 부관 등과 함께 왕 씨를 따라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고 왕 씨는 일본군에게 항복하라고 고함을 쳤다. 장군은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 씨 등 배신자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 했다. 남만주 신빈현에 세워진 항일명장 양세봉 장군의 조각상 중국 요녕성에 위치한 양세봉 장군 순국지 (표시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