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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천마산대 가입으로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길에 들어서다 1922년이 되자 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 하는 등의 독립항쟁지원을 시작했고 그해 겨울에는 천마산대 에 가입해 경찰서, 금광사무소 등을 기습해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해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활동도 했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계획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공격하자 국 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 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이때 장군은 광복군총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군기 확립을 다지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 올려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 군총영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조선총독부 기관을 폭파하는 활동을 했다. 1922년 8월 만주의 독립군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하나로 통합한 대한통의부를 결성했다. 하지만 이념 갈등으로 독립군끼리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복벽주의 일파가 의군부를 조직해 분리했다. 남은 독립군은 임시정부 직할 군단인 참의부를 조직했고 장군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국경 순시 온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을 지휘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장군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했다. 사이토는 압록강에서 경비선을 타고 국경을 시찰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장군의 지시로 사격이 시작됐으나, 생각보다 너무 멀어 총알이 제대로 닿지 못했다.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 력으로 도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삼시 협정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을 체결했고 중국 당국은 독립항쟁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일제의 만주 진입으로 흩어진 독립단체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념을 초월한 통합운동을 추진한다.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결실이 이루어졌다. 장군은 어떤 단체에 소속되던지 조직을 만주에서 활약하는 양세봉 장군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