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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 독립장│신팔균(申八均) 조국독립을 위해 많은 순국선열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중 가족 모두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 팔 균 장군은 일제하에서 만주를 무대로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대표적인 무장투쟁가다. 지청 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다. 독립항쟁최전선에서 싸운 명문가의 아들 신팔균 선생은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정동 현재의 영 국 대사관 자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했으며 조부와 고조부도 중요 직책을 맡아 대대로 고위 무관을 맡아 온 명문가였다. 신팔균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 부터 유학과 병법서에 능통했다. 1900년 대한제국의 육군 무 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해 1903년 9월 육군 참위로 임관해 서 울 방위를 담당하던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황실 경위 와 의장대의 성격을 띤 근위보병대에서 복무했다. 1909년 7 월 육군 정위로 진급했지만, 이름뿐인 군대와 날로 기울어져 독립군 3,000명 배출한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대한통의부 사령관 겸 군사위 원장으로 활동했다. ●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중구 출생 ●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 ●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 ● 1922년 대한통의부 사령관 겸 군사위원장 ● 1924년 7월 2일 왕천문 이도구에서 전사,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핵심공적 주요약력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던 신팔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