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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219 이듬해엔 중광단을 확대 개편해 대한정의단을 만들고 이는 대한군정부 그리고 다시 북로군정서로 조직 개편과 함께 이름을 바꾸어 나가면서 임시정부의 산하 무력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정규병력 1천 5백 명을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와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다 일제는 만주 내에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 분으로 만주 일대에 군대를 파견한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들은 일본과의 전투가 불가피 함을 알고 서로 협조를 함과 동시에 전투 준 비를 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이동 상황을 탐지하고 청산리를 중심으로 약 1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북 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준다. 하 지만 일본군은 패배의 보복으로 만주 지역 내의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독립군은 10개 부대가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일본공사 요 시자와가 ‘러시아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 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 래할 것’이라며 위협해 러시아는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한편, 자유시참변을 획책하여 러시 아로 건너간 독립군은 힘을 잃고 말았다. 수많은 동포가 희생을 당하자 비분강개 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 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 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 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 하리라”며 자결 순국했다. 서일 선생이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을 알린 보도기사(독립신문, 1921년 12월 6일자)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대종교의 삼종사 서일 선생과 나철 선 생, 김교헌 선생의 묘. 첫번째 무덤이 서일 선생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