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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조직망을 확대했다. 8월에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하얼빈, 노 령, 시베리아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하면서 무기 구입 에 주력했다.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 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에 사단본부를 설치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자금을 모을 공채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렇게 외부적으로는 독립항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성과를 올렸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병활동을 한 유생 출신의 중장년들과 3.1 운동 이후 참 가한 청년들의 이념문제였다. 생각 차이를 바로 보여주는 일이 연호 문제였다. 의병출신들은 대한제국 융희 연호 사 용을 주장한 반면, 청년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호 사용 을 주장한다. 결국 장년 중심의 기원독립단과 청년중심의 민국독립단으로 분리되고 만다. 독립단은 분리됐어도 독립항쟁에는 한마음 독립단은 분리됐지만, 박장호 선생은 조국광복의 길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실천했다. 선생의 지휘로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 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永柔郡)에서 우 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한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는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했다. 항상 성과만 올린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반격으로 대원이 전사하거나 폭파 계획이 들켜 실패하기 도 했다. 하지만 선생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원들의 공격으로 일제는 참기 어려운 곤 란을 겪게 된다. 일제는 독립단의 활동을 막기 위해 정보를 입수한 끝에 독립단을 지휘하는 박장호 선생을 제거하 기로 마음먹는다. 선생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조선인인 김헌을 파견한다. 1921년 7월 봉천성 무성 현에서 선생은 일제의 앞잡이 김헌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한다. 박장호 선생의 홍천세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