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19 통감으로 두고 내정 전반에 대하여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을사늑약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 권 박탈이었다. 즉 다른 나라와 조약이나 협정을 맺을 때 일제가 우리나라를 대신한다는 것으로 이 는 곧 우리나라의 주권 상실을 의미하였다.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분노는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었다. 조병세, 이상설, 안병찬 등은 조약폐기 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 조병세, 이한응 등은 치욕과 망국의 한을 견디다 못해 자 결하였다. 또한 나철, 오기호 등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의 집과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일진회를 습격하였으며, 의병들은 오직 위태로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에 맞서 죽음도 불사한 결사항전을 벌였다. 을사의병 가운데 민종식, 안병찬 등을 중심으 로 한 충청도 홍주 의병이 규모면에서 가장 컸 다.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안 병찬 등 충남 유생들은 전 이조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1906년 의병을 조직하고 항쟁에 나섰다. 순식간에 의병 500여 명이 모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무기 및 의병 수가 부족하여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홍주성 전투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을사의병 가운데 가 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전라도에서는 양반 유생인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의병을 조직하였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들어갈 때는 100여 명이었던 의병이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남원에서 일본군이 아닌 관군과 맞닥뜨린 최익현은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결국 최익현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 다 단식 끝에 생을 마쳤다. 양반들이 재산을 바쳐 의병을 일으킨 까닭에 의병장은 대개 양반들의 몫이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었다. 신돌석은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기세를 올렸고, 이미 을사의병 때 부터 수많은 공을 세워 ‘태백산 호랑이’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의병이 3천여 명에 이를 정도 였으니 이는 경상도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부대였다.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일제에 매수당한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이 의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탈환에 성공 한 홍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