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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에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복으로 서간도나 북간도지역 한인사회는 참변을 겪었고 선 생의 가족도 큰 피해를 당했다. 김동삼 선생은 이때의 참변으로 붕괴된 한인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22년 남만통일회의를 통해 통의부를 설정하였으나 내부분열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다시 3부 시대가 되었다. 1923년 1월에는 흩어 진 독립 세력을 통합할 국민대표회의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열려 의장이 되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 고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1927년 이후 김동삼 선생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 된 유일당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김동삼 선생의 독립단체통합 운동은 번번이 실 패했지만 통합을 위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이 모두 손꼽아 존경한 인물 이런 와중에 김동삼 선생은 1931년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고 국내로 압송돼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투옥됐다. 그 후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고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일송 김동삼 선생은 한국독립항쟁의 최고의 지도자임에도 30년 동안 그가 세상에 남겨놓은 기록은 거의 없다. 만주에 정착한 후 고향집 안부를 묻는 편지와 마지막 형무소에서 집안 걱정을 하면서 종반 에게 쓴 편지가 있는 정도다. 사진도 1923년 상해 국민대표 회의의 의장으로 활동할 때 누군가 촬영한 것과 하얼빈영사관 감옥과 서울서대문형무소 수형사진 정도다. 자신을 밝히지 않으려고 한 그의 내면 세계는 본인의 임종을 예견하고 후세에 남긴 독특한 유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유언 몇 줄은 보는 사 람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독립투사들도 이념과 지역을 초월해 선생만은 공·사(公·私)간에 흠 이 없는 사람이라고 증언할 정도다. 장례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한용운이 주선하여 치러졌다.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 던 성북동 심우 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김 동삼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 강에 뿌렸다. 한용운 선생이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번뿐이라고 전해진다. 경북독립항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만주항일독립항쟁의 3거두. 왼 쪽부터 우당 이회영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