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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95 중심으로 길림주민회, 의성단, 대한독립단, 광정단동친목회, 변론자치회, 고본계, 대한독립군단, 학 우회 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 산하 의용군 사령장에 오 동진 선생이 겸무했는데 8개 중대에 무장한 7백여 명의 병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에는 각계 인사들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했다. 좌우익이 힘을 합해 독립항쟁을 추진하 기 위한 단체다. 당원 수는 1천 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 임하고 일제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기록에 따르면 1927년까지 부하 연인원 14,149명을 지휘하여 일제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관리 살상 149명, 밀정 등 살상 765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옛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잡히다 한창 일제에 대한 공격이 가열차게 진 행되고 있을 무렵 옛 동지 김종원이 “삼 성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춘 시내 에 있던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만나자는 사람은 없고 신의주의 고등계 형사인 김 기덕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김종 원이 배신하고 선생을 밀고했던 것이다. 일제에 잡힌 오동진 선생은 일제의 재 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 11일부터 33 일 동안 단식했다. 1932년 3월 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됐지만 미쳤다는 이유로 퇴장 당했고 오동 진 선생이 없는 재판장에서 검사는 무기징역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아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동진 선생은 더이상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 다고 판단하고는 항소를 포기했다.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오동진 선생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였다. 일본인 의사가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려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옮겨졌다. 일평 생 일제에 대해 무장항쟁을 했던 오동진 선생은 해방이 되기 고작 한 해 전인 1944년 12월 1일 옥중 에서 순국하고야 말았다. 오동진 선생의 순국과 관련한 추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