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page

19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1920년 1월 13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대한청년단연합회 취지서」, 「대한광복군총영 약장」, 「광복 단 무장활동 보고서」에 관한 것이다. 지역에 흩어진 조직들을 통합해 광복군총영을 만들다 당시 독립항쟁조직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작은 조직으로 활동하면 활동 범 위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 독립항 쟁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래서 각 독립항쟁조직들은 통합을 위한 협 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동진 선생은 인근 지역의 대한의용군 사의회와 한족회, 기원독립단, 민국독립 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에 참여했다. 통 합된 조직은 1920년 6월 6일 대한민국 임 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을 중심으로 독립 항쟁을 위한 실질적 단체로 변모했다. 광복군사령부 사령관에 조맹선, 참모부장에 이탁, 경리부장에 조병준이 임명되고 오동진 선생은 총영장이 됐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미국의회 동양 시찰단인 모리스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이 8월 14일 서울에 온다는 정보를 얻었다. 광복군총영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의지를 세계에 호소하 고 , 국내에 있는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김영철, 장덕진, 안경신 등 비밀 요원을 평양, 신의주, 선천, 서울로 보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 요인들을 사살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밀정과 관리 등 900여 명 사살 오동진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이 제안하는 동삼성 내 독립항 쟁단체 통합에 적극 찬성하고 양기탁, 김동삼, 현정경, 이상룡, 이 탁 등과 광복군총영, 서로군정서, 한교민단, 광복단, 독립단대한청 년 연합회를 통합해 통군부를 만들었고, 2개월 후 대한통의부로 발 전시켰다. 이듬해 6월 신팔균 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 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하게 됐다. 1925년 1월 25일경에는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 등과 통의부를 오동진 선생이 총영장으로 활동한 대한광복군총영의 약장(1920년 7월 1일). 대 한광복군총영의 명칭·목적·위치·단원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