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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3.1 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 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훈춘사건’을 일으켜 2만 명의 병력을 만주에 파견했다. 4천여 명의 독립군은 총 3만여 명의 일본군과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을 승 리로 이끌었다.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 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했다. 청산리 전투는 간도 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일제는 이때의 패배로 중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 했다. 독립군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등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 장군은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모아 대한독립군단을 만들고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항쟁단체을 통합해 신민부를 조직 했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향상 에 주력했다. 신민부 조직 이후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며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의 작전지도 등 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좌진은 영 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1930년 1월 24 일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 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 고 순국했다. 광복회·대한군정서·신민부·한족총 연합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1920년 청 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청산리전투 승전기념 사진.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전장을 누비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