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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91 거지를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의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평생을 지킨 신념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무럭무럭 커서 청년이 된 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던 30여 명의 노비를 모아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전답을 나눠주었다. 그리곤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무관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는 무관학교에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조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겪었다. 일제의 방해에도 멈출 수 없었던 독립항쟁에 대한 의지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으로 귀향했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호명학교를 설립했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개화와 신학문 교육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모습을 본 김좌진은 군자금 모집 과 대한광복회 활동을 시작으로 항일 항쟁에 뛰어들었다.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 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수시로 조사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독립항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서간도 지역에 독립항쟁기지를 마련하고자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몇 번이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지 만, 결코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1917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됐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을 배출한 사관연성소 일제의 압박은 날로 심해져 독립항쟁의 중심은 국내에서 만주로 옮겨졌다. 김좌진 장군은 1919년 3월 중순 길림군정사를 조직했다. 길림군정사는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무장투쟁 조직이다. 그 해 가을쯤에 대한정의단과 연합했다. 대한정의단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군사전문 가가 없었고 길림군정사는 조직을 뒷받침해줄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이루어진 연합이었다. 1919년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하는 조직이 됐다. 군사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이다. 김좌진 장군은 1920년 2월 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또한 사관연성소 교장이 되어 미래의 독립군 간부 에게 역사·군사학·병기사용법·부대지휘법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를 만들었다. 교성대는 잘 훈련된 최정 예 부대로서 이후 김좌진과 함께 일본군을 섬멸시킨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군정서군의 주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