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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89 그런데 마을 사람(일설로는 채응언의 처남이라고도 한다)이 밀고하여 평양 헌병대 성천(成川)분대와 파출소장 다나까(田 中瀞雄) 등이 출동하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채응언은 약속 한 군자금을 받으러 안광조를 데리고 밤 11시쯤 산을 내려오 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져 권총을 발사하 였으나 적중하지 못하고 단도로 육박전을 전개하여 30여 분 동안 격렬히 싸우다가 체포당하였다. 그리하여 전중 상등병은 많은 부상을 입고 현상금 250원을 탔고 그의 보조원으로 그의 체포에 힘쓴 박성빈(朴聖彬)과 강 태규(康泰奎)가 각각 50원, 20원씩을 받았다. 그 후 7월 8일에 경무부의 전전(前田) 보안과장과 전중 상등병 등에게 호송되어 평양 헌병대에 구금되었는데 이 때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달 려나온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 평양 시내는 일대 혼잡을 이루기 도 하였다. 일본 헌병중위에게 호된 심문을 받은 뒤 21일 평양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을 뿐, 강도가 아니다 수감된 뒤 일인 검사에게 취조를 받고 소위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되어 8월 31일 사형언도를 받은 후 분개하여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 않다"로 항변하였다. 감 옥에서 자신의 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고 자결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 자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다. 9월 21일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그 해 11월 평양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한평생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투사로서 일생을 마치고 장렬히 순 국하였다. 채응언은 마지막 의병장답게 자신의 의병활동이 정당하였음을 일제가 교수형에 처할 때까지 계속 주장하였다. 그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협객적 농민과 우국지사를 거쳐 보국구민의 의병장으로 의 성장을 통해서 우리 근대사상의 민족운동의 심화과정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항전 끝에 체포된 채응언 의병장. 그는 흔적없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것 외에 어떤 얼굴 사진도 찾 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