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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생은 황해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대일항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경술국치 이후 국가체제가 일 제에 편입되어 국민적 지원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진룡 평산의병부대는 소부대 단위 의 유격전을 지속했다. 이후 일제는 병력을 총동원해 평산의병부대를 공격했다. 1910년 11월 하순부터 4개월간, 1911년 9 월 하순부터 약 한 달간에 걸친 대공격으로 평산의병부대는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타격을 받 고 말았다. 신출귀몰한 솜씨로 송금마차를 공격해 군자금 확보 이후 조직적인 의병항쟁이 불가능해 지 면서 결국 선생은 부대의 지휘권을 중대장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서간도로 향했다. 조맹선, 박장호, 윤세복, 차도선 등과 함께 장백현 무송에서 포수단 을 조직하는데 포수단은 이후에 만주독립 군의 모태가 된다. 이진룡 선생은 다시 조맹선, 이종협과 더불어 독립부대를 조직해 수시로 국내로 들어와 일제주재소를 습격했다. 민첩하 게 공격하고 후퇴해 사람들은 그를 비모 퇴(飛毛腿: 날아다니듯 빠른 사람)라 불렀 다. 선생은 운산금광 송금마차를 습격하 는 등 군자금 확보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신출귀몰하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일 제는 임곡이란 사람에게 선생을 찾게 한 다. 임곡은 의사로 위장해 압록강 근처를 3년간 조사해 결국 이진룡 선생의 거처를 알아냈다. 이진룡 의병장은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에서 1917 년 5월 일제에 잡히고 말았다. 이전에도 잡힌 적이 있으나 세 번이나 탈출했기에 일본군은 만반의 준 비를 한다. 구출작전도 실패해 선생은 평양까지 압송되고 말았다. 이진룡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장남에게 큰 은혜 있는 선생(유인석)의 사당에 참례하여 아비 죽은 것을 고(告)하라고 전하여 달라” 고 남기곤 1918년 5월 1일 평양감옥에서 순국했다. 중국 라오녕성 단동시에 있는 항일민족영웅 이진룡 선생의 기념공원 이진룡 선생 기념 공원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