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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83 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했다. 그 후 선생의 의병진은 좀처럼 초기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의병을 해산했다.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병을 재정비했다. 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투 능력 향상에 집중했고 성능을 향상한 화승총을 개발함과 동시에 군대와 같은 제도를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했다. 다시 일진회원을 처단하고 세무서 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석용 선생의 의병부대는 장기항전으로 인해 전력이 크게 약화한 데 다 일제 군경의 공격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일본군의 회유와 공격에 결국 이석용 선생은 3년에 걸친 의병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의 시신을 수습해 추모하며 결의를 다지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은 선생은 전투 중 사망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고 애도하는 글을 지어 추모하며 결의를 다졌다. 임실군 지의동과 동룡동에 은밀히 의령단을 설치해 전사하거나 잡혀서 순국 한 장졸의 위패를 모셨다.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1912년 겨울에는 조국의 광복 을 위한 비밀결사 임자밀맹단을 결성했다. 이석용 선생은 밀맹단을 중심으로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 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그리고 중국 망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 구의 배반으로 1913년 음력 10월에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이석용 선생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확정된 후 이석용은 15세의 아들과 최후 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들 부부와 2명의 누이 앞으로 쓴 유서를 아들에게 전달하고 <창의일록>과 <불망록>을 남겼다. <창의일록>은 의병을 조직한 후의 진중일기고 <불망록>은 후원을 받은 내용을 남 긴 기록이다.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 르고 왜적을 멸하겠 다고 맹세한 후 당당 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4일, 그 의 나이 37세였다. 이석용 선생 외 28명의 의사들 을 모셔놓은 임실군의 소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