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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79 재 허전의 밑에서 공부했다. 선생의 학문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이 배어있는 실학 적인 학문이었다. 아마도 선생의 투철한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 민족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배양됐 고 외세 및 일제의 침략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선생은 개항 직전인 1875년 향시에 급제했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 4월에 시행된 정시 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그 다음해인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명되 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선생은 1894년 갑오경장 직후 지방직인 영흥부사로 나가기까지 중앙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일제의 야욕을 파악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 이때의 조선은 일제와 청나라가 누가 조선의 주도권을 쥐는지 암투가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임 오군란 이후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 개화파 인사들을 부추겨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해 이후 청나라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일제는 약해진 세력을 만회 하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기회로 군대 를 파견했고 동학농민군이 정부와 화약을 맺었어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일제의 침략 야욕을 꿰뚫어 보고는 ‘논비요급왜병입도소’란 이름의 상소를 올려 일제에 대한 방비와 대비책을 마련해야한다고 했다. 선생이 예견한 대로 그해 6 월 21일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한 뒤, 민씨 정권을 전복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일제가 무력을 동원해 내정에 간섭하고 임금을 능멸하자 선생은 다시 한 번 상소를 올린다. 일제 가 내정개선이란 이름을 내세워 자행하던 정치 군사적 침략을 정확히 짚어냈다. 일제가 침략책동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관문을 닫고 수호조약을 폐기하여 절교하고, 나아가 동맹국들과 연대하여 일제 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명성황후 살해와 폐서인 조치를 강력하게 규탄하다 당시는 일제의 비호 아래 친일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시기였다. 일본군을 도성에서 몰아내자는 선 생의 단호한 상소는 일제와 친일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 결과 임금을 보필하던 우승지 자리에 서 밀려나 영흥부사로 임명돼 지방으로 파견됐다. 일제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쫓아냈다. 동시에 다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