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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77 망할 뻔한 가문을 살리고 관료로 활동 4월 중순 다른 의병들이 타지에 나가 있는 사이에 진주성이 공격받게 된다. 진주성에는 선생과 불 과 50~60명이 의병이 있었을 뿐이었다. 4월 24일 밤 700여 명의 적군이 성벽을 넘어들어오자 선생 은 병력을 이끌고 성을 탈출해 삼가에 주둔하던 정한용 의진으로 갔다. 그러나 선생이 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한용은 의진을 해산했고, 안의에 있던 서재기마저 살해 되자 선생도 의병을 해산하고 새로운 항전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노응규 선생의 부친과 형이 살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등 멸문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이를 피해 각지를 전전하던 선생은 학부대신 신기선과 법부대신 조병식의 주선으로 궐내에 들어 가 상소를 올렸다. 상소는 광무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사면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안의의 서리들은 자 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선생의 귀향과 아버지와 형의 장례도 막았다. 게다가 노응규 선생까지 살해하려 하자 조병식, 이유인, 민영준 등의 협조로 왕명을 받아 1898년 4월 부형을 살해한 안의의 서리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선생은 합천 청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을 모아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규장각 주사에 임명돼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 경상남 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 의관, 동궁 시종관 등을 역임했다. 충북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하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광무황제는 선생에게 비밀리 시찰사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 마패를 하사해 거의를 독려했다. 노응규 선생은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했다. 최익현 의진은 태인읍 을 점령한 뒤 정읍과 순창을 공략했다. 하지만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의병 장을 비롯한 13명의 의병지도부가 잡혀 의진이 해산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상남도 창녕으로 피신했고 1906년 늦가을 충북 황간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황간의진 은 경부철도와 열차, 그밖에 일제 시설물 등을 파괴해 전과를 올렸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척후대 를 괴멸시켰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에 의해 지도부의 위치가 발각돼 1906년 12월 8일 선생을 비롯한 서은구, 엄해 윤, 김보운, 오자홍 등 의병지도부가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에게 잡혀 의병부대는 해 산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무청 감옥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일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가 1907년 1월 4일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