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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그 후 김도현 선생은 5읍도집강 자리에서 지역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하지만 1905년 외교권 이 박탈당하자 선생은 서울로 가서 조약이 무효라는 것과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담아 상소 를 올리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을 보냈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투쟁의 깃발을 올리며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양군수 이 범철의 요청에 따라 안동에서 진위대와 일본군이 몰려들어 의병의 군비로 쓰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재산을 압류하고 선생을 잡아갔다. 이러한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는 바람에 이범철 군수 의 탐학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때문에 선생이 붙잡혀 고생한 기간 은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동짓날 아침 해를 바라보며 동해에서 생을 마감하다 광무황제가 각지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내렸고 가까운 태백산맥을 중심 으로 신돌석 의병을 비롯해 여러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선생은 더이상 의병 을 일으킬만한 여유가 없어 그 대신 각지 에 의병을 일으키라고 설득하는 ‘의격고 삼남각군문‘를 지어 보냈다. 나라를 위한 다른 방안을 찾던 중 안동 에서 신식학교인 협동학교가 문을 열었다 는 소식을 듣고 선생도 계몽운동에 앞장 서기로 하고는 영흥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이 학교를 세울 때 친일파 윤필오와 일 본군 헌병대장의 후원도 받아 선생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1910년 9월, 선생의 스승인 이만도가 단식으로 자결을 시도한다. 많은 사람이 이만도를 찾았다. 선 생은 스승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이만도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며 말렸다. 선생은 뒷날 따라가겠다고 이야기한 후 이만도를 따라 자결한 사람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고향에서 영흥학교를 꾸려가던 선생은 1914년 아버지의 상을 마치자 동해로 떠났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뒤쫓아 왔으나 선생은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과 ‘절 명시’를 남기고 김도현 선생은 떠오르는 동짓날 아침 해를 바라보며 동해 바다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경북 영덕의 산수암 위에 만들어진 김도현 선생 도해단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