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page

17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이 군사가 한번 파(罷)하면 우리 모두는 왜놈이 될 뿐이다.” 하지만 진주의 노응규 의병부대를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가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는 동시에 남로선유사로 파견된 신기선이 광무황제의 해산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이에 기우만은 의병부대를 해산했고 선생은 의병부대의 해산에 극력 반발했다.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 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야. 이 군사가 한번 파(罷)하 면 우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 그 뒤 선생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의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잡혀 약 보 름 동안 감금되었다가 평리원장 이용태의 배려로 석방되어 귀향했다. 이후 조국의 운명은 더욱 빠르게 기울어져 갔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에 이어 2월 23일 에는 전쟁에 필요한 정치적, 군사적 지점을 제공한다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됐다. 그리고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지면서 재정권을 박탈당했다. 1905년에는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식민지 상태가 됐다. 결국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전국에서 다시금 의 병 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다. 영광 법성포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다 고향에서 조용히 살던 기삼연 선생도 전국의 의병봉기 소식을 듣고 동지를 모아 1907년 음력 9월 영광 수록산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 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연합 의병 지휘부를 결성했다. 동시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 항쟁을 촉구하면서 병사를 모집했다. 그리고 광무황제에 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 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단위부대 로 편성한 뒤 분산 활동했다. 그 러다가 작전 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해 집결지에 모여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하는 작전을 반복했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좀처럼 의병부 기삼연 의병장의 주둔지였던 문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