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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없어 오히려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았다. 선생은 감격해 하며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의 전주 이 씨 제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오랜 기간 대항을 위해 지리산에 근거지를 마련하다 그 후 고광순 선생은 고령의 나이로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고군분투했다.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 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07년 9월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 추고자 지리산 피아골에 사람들을 모 았다.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있는 연곡 사를 본영으로 삼고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워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췄다. 지리산이 영·호남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 경은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이 공격을 개시했고 의병들은 연곡사 구석으로 몰렸다. 의병은 우세한 인원을 바탕으로 완 강히 저항했지만, 워낙 무기의 차이가 컸다. 이 전투로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6명이 연 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했다. 일제 군경은 연곡사 안 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해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될 수 없게 하고 말았다. 고광순 의병장 사적비 지리산 연곡사는 임진왜란에 이어 의병 근거지로, 구한말 일제에 의해 다시 불태워 진 수난의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