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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61 유학 경전 중에서도 선생이 특히 심취했던 책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 으며 월남망국사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책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 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마을인 익산군의 낙영당에서 강회를 열 때 동향인 이석용과 함께 참 가하여 우국충정 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전해산 선생은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 여 실천 유학자로 자라났다. 창의동맹단에서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 당시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반발로 최익현이 창의토전소를 올려 의병을 일으킬 뜻을 밝히고 호남 유림지사와 문하생들을 규합해 1906년 6 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전해산 선생도 이석용과 함께 최익현을 만났으나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 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해 실망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백성으로부터 추앙받던 최익현의 항일운동 활동은 그를 감 화시켜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 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전해산 선생도 여기에 참가한다. 이후 김용구 의병부대의 패전으로 회맹소가 없어지자 선생은 전라북도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이 조직한 창의동맹단에 합류해 본격적인 의병 활 동을 시작한다. 선생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경찰서, 헌병분파소 등 의 건물을 습격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그해 3월과 4월 일본군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해 의병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잡히거나 순국했다. 남은 의병을 모아 재기를 준비할 때 시위대 참위출신인 정원집이 해산당한 군인을 이끌고 선생을 찾아왔다. 대동창의단을 일으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그동안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낮은 위치에서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정원집이 이 끄는 해산 군인까지 합세하자 결국 요청을 받아들여 1908년 7월 25일(음)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의병 구성원의 정체가 발각되면 마을 전체가 보복대상이 될 수 있고 훈련부족으로 일본군과 전해산 의병장 약속문 전해산 의병장이 쓴 8폭 병풍용 묵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