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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59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음력)로 정한 선생 은 예하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하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 대원 3백여 명을 선발한다. 공격개시에 앞서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하고 서울에서 인쇄해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늑약의 폐지와 13 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 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부친 사망소식까지 접하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싸웠음에도 빈약한 화승총으로는 기관총과 잘 훈련된 군대를 이기기는 힘들었 다.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들은 일본군에게 막혀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 게 됐다. 이인영 선생은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진영을 재정비할 무렵, 1907년 12월 25일(음력) 부친 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선생은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며 자책한 후 허위에 게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허위가 사로잡히 는 바람에 서울 공략계획은 이로써 무산됐다. 선생은 이후 시영(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상북도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며 삼년상이 끝나 는 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9월 20일, 42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3도의진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망우리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