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page

15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월 11일에 잡히고 선생의 의병부대에서도 임운명 등 120명의 의 병이 일본군 수비대에 투항하는 등 내부적 동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임진강 연합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펼치고 필요할 때는 대규모 연합전을 펼쳐 일 제는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전력을 보충하 고 통신시설을 정비해 경기 강원 ,황해 지방에 걸쳐 가장 성망이 높고,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의 연합 의병부대를 목표로 본격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했다. 오랜 기간의 전투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군량미와 탄약이 부족 해진 상태였는데 이때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의병에 가담한 강기 동이 “재무서에서 납부된 세금은 우편물과 함께 서울로 운송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선생은 우편물 습격을 계획하고 동시에 각 면, 동장에게 격문을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았다.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던 일본군은 군·경 합동토벌대를 편성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폈 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포천과 양주로 옮겨 다니며 이들의 수색 작전을 피했으나 3월 4일 포천군 무 림리에서, 3월 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고 전투력을 거의 상실해 의병부대는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생은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친일 밀정 박 노천, 신좌균 등은 과거 선생의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선생을 서울 로 유인했다. 이들의 함정에 빠진 선생은 3월 31일 박노천, 신좌균을 만나기 위해 용산역으로 갔다 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재판정에서 의병활동은 한 국의 독립 보존은 물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1909 년 5월 10일 선생은 일제가 사법권 을 행사하던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 형을 선고받았다. 이은찬 선생은 옥 중시를 남기고 6월 27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이은찬 의병장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