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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55 무장한 뒤 대구 진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조동호와 함께 사로잡혀 전기 의병전 쟁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이은찬 선생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그해 9월 이구채와 함께 해산군인 8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경북 문 경에 은거하고 있던 이인영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관동창의대를 결성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 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의 허위 의병부대가 원주에 이르자 선생은 그와 함께 전국의병연합체 결성 을 적극 추진했다. 13도창의대의 서울진공작전 계획의 핵심 박은식의 「한국독립항쟁지혈사」에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대 결성이 이은찬 선생의 지 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군의 장령 임명도 모두 선생이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주도 로 그해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편 성했으며 동시에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했다. 1907년 12월부터 두 달여 동안 13도 창의군은 서울 근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대 문 밖 30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냈지만 창의대 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고 의병부대끼리 유기적인 협조 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서 울 진공작전은 실패했다. 이후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여기서 선생 은 허위를 중심으로 조인환, 왕회종, 김진묵 의병부대와 김수민, 박종한 의병부대를 규합해 임진강 연합의병을 결성한다. 이들 연합 의병은 그해 4월 21일 전국에 의병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했 으며 5월에는 통감부 폐지, 외교권 반환 등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재차 서울 진격 작전을 추 진했다. 유격전과 연합전으로 일제의 허를 찌르며 공격 경기 북부에서 의병전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 등을 동원해 임진강 연 합 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감행했다. 임진강 연합 의병부대를 이끌던 허위가 그해 6 서울진공작전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