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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지에서 일본군수비대 를 격파해 일본군은 선 생의 이름만 들어도 두 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 했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는 백남 수와 김치헌 등의 휘하 장병들과 함께 일진회 를 비롯한 친일 세력들 을 대거 처단해 농민들 사이에 명성을 더욱 높 였다. 신돌석 선생의 명성은 영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전국적인 것이어서 이해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연합부 대로 13도창의군이 결성될 때, 신돌석 선생은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임명됐다. 하 지만 일제의 방해로 서울진공작전에 합류하지 못하고 영남으로 되돌아 왔다. 현상금을 노린 옛 동료의 손에 안타깝게… 1907년 말 경상북도 일월산 등지에서 휴식하며 전력을 보충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안동의 유시연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취하면서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부대 단 위로 편성하여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강화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 수시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 술이었다. 이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일본군은 선생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군경 분파 소를 설치하지 못했고, 정찰활동도 낮에만 하는 형편이었다. 일제는 여러 작전이 모두 실패하자 회유로 방법을 바꿨다. 경상북도 관찰사의 서약서, 통감의 편 지 등을 통해 귀순을 권유했지만, 신돌석 선생은 이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겨울이 다가오자 그동안 의 전력 손실을 보충해 다음 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했다. 이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었다. 그날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 선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선생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신돌석 선생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신돌석 선생은 굳게 믿었던 사람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신돌석 의병장 전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