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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49 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선생 대에 와서는 평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했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고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 이 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 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부친의 지도와 격려 아래 일찍이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그리하여 15세가 되자 선생은 정세를 파악하고, 뜻을 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지사,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그를 빌미로 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를 경험하면서 자신 의 반일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강대국 이권 싸움에 휘말린 조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공사관과 일본 거류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해 5월 7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등 청나라와 일제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반도가 청일 양국 군대 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체결해 파병의 빌미를 제거했지만, 일제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각종 협약을 강제 체결해나가던 일제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일으켰고 단발령을 강요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신돌석 선생은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동안 사귀어온 동지들과 함께 고향에 서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선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영해의병진의 중군장 이 됐다.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김하락 의병장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 신,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신돌석 선생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재기 를 준비했다. 일제가 두려워 한 ‘태백산 호랑이’의 명성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이 펼쳐지 자 신돌석 선생은 1906년 3월 13일 영해 북평리에서 아우 신우경과 함께 활빈당이란 이름을 걸고 3 백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거병 직후 선생의 명성을 듣고 온 많은 사람들이 지원해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다.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 9척을 격침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동해안 일대, 경북 내륙지방, 강원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