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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37 강력한 전투력으로 대승을 거두고 다른 의병과 연합 모인 병력은 900명 정도였다. 주로 포군들을 모 집하여 조직됐기때문에 다른 의병보다 훨씬 전투력 이 강했다. 병력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 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같은 해 1월 18일 백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 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 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 장터 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벌인 대대적인 승리는 의병 봉 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많은 영향을 줬다. 하지만 2월 12일 새벽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를 맞아 이현에서 대접전을 벌였지만, 화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눈보라까지 몰아쳐 후 일을 기약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4일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상희 의병장을 방문해 여주의진과 합쳐 제2차 이천수창의소 를 조직했다. 2월 28일 근거지를 이천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겼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심진원이 이끌던 광주의진, 이석용이 지휘하던 양근의진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결성 해 병력 1,600여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갖추게 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의병 투쟁 이 시기 국내 정국은 돌변하고 있었다. 1894년 6월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씨정권을 붕 괴시켰고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그리고 는 친일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령을 내리는 한편 민심 수습책으로 단발령을 폐지 하고 의병 해산조칙을 반포했다. 이와 같은 정국변화와 단발령 폐지라는 명분 상실에 따라 다수의 유생 의병장들이 자진하여 의진 을 해산했지만, 김하락 선생은 왜적 구축과 국모 살해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의 병 해산이란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주장하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했지만 계속되는 회유와 함께 대규모의 공격으로 남한산성을 빼앗겨 서울진 공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이 지휘하던 이천의진도 의병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 을 거의 상실했다. 김하락 선생은,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의병 활동의 전개를 위해 영남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 이천의병 전적비. 김하락 의병장이 1896년 1월 18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