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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당시는 의병전쟁이 거의 소멸해 가던 시기였고 의병들도 속속 일제에 투항하던 상황이었다. 어 째서 헌병에서 의병이 되기로 마음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가 해 온 반민족적 행위 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민족으로부터 찾으려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헌병대에서 근무한 정보를 바탕으로 군자금 확보 방법을 건의 강기동이 투신한 창의원수부는 중군장 이은찬을 정점으로 경기 동북지방 최대의 연합의병부대 였다. 포천·양주지방의 산악을 근거지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군량미와 탄약이 부족해지고 의병들의 부상과 사망 으로 병력도 부족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에 창의원수부에 투신한 강기동은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계획을 건의했다. 의 병들은 우편물을 단순히 편지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시 재무서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 서 취급하고 있었기에 이를 탈취하면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공금은 대한제국 국민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이었고 일본의 배를 불리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 었기 때문에 세금탈취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와 매판정부에 반대하는 전시효과와 동시에 의병부대 의 군자금 확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강기동 선생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 내부의 정보를 의병장 이 은찬에게 제공해 창의원수부의 의병활동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강기동은 투신한 지 불과 1개월 만에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됐다. 의병 대장으로 활동을 시작해 일제를 괴롭히다 하지만 연일 거듭된 전투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결국 일본군에게 토벌되고 창의원수부는 와해되고 만다. 별도로 의병부대를 운영하고 있던 강기동 선생은 이은찬 선생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즉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때는 일제의 의병토벌계획이 진행되는 중이라 직접적 전투는 최대한 피하면서 의복, 식량, 군 자금 확보에 집중하고 밀고자를 처단하면서 조직을 정비해나갔다. 9월부터는 소규모 유격전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의 의병은 소규모 부대로 이동하고 연합작전을 통한 전투, 그리고 다시 흩어져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대규모 전면전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규모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