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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고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허위 선생을 감옥에 가두 고 항일 투쟁을 중단하라고 했으나 허위 선생이 조금도 굽힘이 없자 일제는 헌병의 감시 아래 강제 로 고향으로 보냈다. 감시를 받으며 살던 허위 선생은 ‘을사늑약’ 소식을 듣게 됐다. 이때부터 선생은 각 지역을 돌며 의 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했다. 이어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됨에 따라 허위 선생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곧 이인영 부대를 추축으로 하는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에 참 여한다. 경기도 북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격파 13도창의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했다. 동시 에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의병전쟁은 광무 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 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로부터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1만여 명에 달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이인영 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소식을 닫 고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고 격문 등으로 인해 이미 공격사실이 알려진 뒤라 철저하게 준비된 일본군 의 방어를 뚫지 못해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허위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통신을 마비시키고 부일 매국분자들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08년 6월 11일 은신처 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잡히고 말았으며 1908년 10월 21일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기념공원 에 건립된 선생의 동상. 순국 직전 까지 일제에 항거한 의병장 허위의 곧은 기개와 충절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