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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31 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선생의 나이 마흔이 되던 1894년, 전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허위 선생이 살던 구미 인 근의 선산과 상주 등지는 동학 세력이 강성하던 지역이어서 환란의 중심에 있었다.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지금의 청송 지역인 진보군으로 일시 피난하였다. 허위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시기는 1896년이다. 전해인 1895년에 명성황후의 살해 사건 이 있었던 다음 달에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연이어 일어났다. 몇 달간 전국의 의병 소식을 듣던 선생은 본인도 의병으로 나설 마음을 먹게 된다. 의병으로 활동하던 허위 선생, 관직으로 나아가다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이기찬,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1896년 3월 26일 장날에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과 함께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허위 선생은 이기찬을 의 병대장에 추대하고 본인은 참모장이 되었고 김산의병이라 이름 붙였다. 의병은 무장을 갖춘 후 성주와 지금의 김천인 김산에 진을 쳐두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해 의병을 모집했다. 예전에 동학군을 격파한 전력이 있던 지례 군수는 의병을 막기 위 해 군내의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대구관찰사에게 의병 봉기를 보고했다. 김산의병은 지례의 군대는 쉽게 격파했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 았다. 이은찬과 조동호 등의 의병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선생은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 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북상을 계속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해산 하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허위 선생은 해산 후 큰형의 집에서 학문에 열중했다. 3년 후 신기선 선생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간 후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오 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에 임명됐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관직에 있는 동안 항일 언론가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과 교류하게 됐다. 허위 선생은 그동안 전 통 유학을 학문 기반으로 삼아왔으나 그와 만나면서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1904년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調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더욱 가속화 했다. 허위 선생은 이상천, 박규병 등의 동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을 규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