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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순국선 열 , 의 숭고한 삶 129 최익현 선생을 대마도로 유배 보내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편지 최익현 선생의 사망 보고 서류 리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80명의 사람을 이끌고 정읍을 점령한 선생은 군사를 모집했다. 동시에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 어 국권 침탈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를 따르는 의병이 5백 명이 넘었다. 남원의 방비 가 너무 강해 잠시 물러났지만, 그의 의병에 합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80명으로 시작한 의병은 그때 이미 900여 명에 달했다. 동포와 싸울 수 없어 순순히 잡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 람을 보내 황제의 칙지를 가지고 왔 다. 최익현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펼쳐보았으나 그 내용은 “의병을 해 산하라”는 것이었다.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일제의 꼭두각시가 된 정부는 전 라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를 동원 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 린다. 관찰사는 진위대를 동원해 순 창 외곽을 봉쇄하고 읍내를 향해 진 격했다. 처음에는 일본군인 줄 알고 방비했으나 동족임을 알고 싸우지 말고 의병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최익현 선생의 호소에도 관찰사는 세 번이나 해산을 종용했다. 동족 과 싸울 수 없었던 선생은 응전하지 않다가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최익현 선생은 이곳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모두 해산시켰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22명과 함께 관군에게 붙잡히 고 말았다. 대마도로 유배를 간 최익현 선생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 식에 돌입했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음식을 먹였지만 모두 뱉어내 결국 1907년 1월 1일 대마도 유배지에서 자정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