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page

제 3 장 │ 순국 선 열 길 따 라 얼 따 라 113 지방 일대에서는 국민부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지역 항일투쟁단체는 두 개의 당(黨)·정(政)·군(軍) 체제로 통합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민족주 의 항일단체인 양대 세력은 공화주의적 이념을 표방하며 한인자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한인(韓人) 들의 권익보호 및 교육·산업진흥, 반공투쟁과 일제 주구의 숙청,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 한 무장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과 영릉가 전투 1929년 창립된 국민부(國民府)는 성립 초기부터 입법(立法)·행정(行政)·사법(司法) 등 3권분립에 입각한 국민정부를 표방하였으며, 중국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남만주 일대 교포사회를 영도하는 정부조직이었다. 조선혁명당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창건된 조선혁명군은 1931년 9·18사변 이후 남만주 지역에서 봉기한 항일의용군 및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과 연합하여 1938년 9 월까지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일제와 투쟁하 였다. 조선혁명군은 일본군과의 단독전투와 중국군과의 연합전투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사 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29년 7월 유하현 추가가, 1930년 통화현 전투와 1932년 1월 양기하(梁基瑕)부대의 하로하 연강 대혈전 등은 대단하였 다. 그리고 1932년 3월에서 7월에 걸친 흥경현(興京縣 : 현재 요녕성 신빈현) 영릉가(永陵街) 전투는 일본 관동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대승첩이었다. 당시 총사령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중국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閏)의 병력 2만여 명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 본·만주국의 연합군에 크게 승리했다. 그러므로 조선혁명군은 중국 동북 남만주 일대에서 크게 활 약한 최후의 민족주의 계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독립군의 전투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과 기념비 조선혁명군 본부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진) 영릉가 전투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