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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간도 용정으로 와서 최병익의 여덟 칸 집을 구입하여 서전서숙을 창립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17년 3월 2일, 동지들은 힘을 합하여 기필코 조국독립을 이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47세의 나이로 이국땅에서 순 국하였다. 용정 3.13만세 시위 1919년 3월 13일 정오 북간도 용정의 서전대야(瑞甸大野).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독 립선언식을 알리는 교회당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정에서 이백 리 거리에 있는 도문, 훈춘, 왕 청현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전날 밤부터 출발하여 밤새도록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고, 연길, 두도구, 동불사, 개산툰 등지에서는 새벽부터 집을 나 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명동학교 학생 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달려왔고, 두만강 변에 있는 정동학교 학생들은 밤늦게 출발하여 당 일 새벽에 도착하였으며, 용정시내의 은진, 동 흥, 대성학교 학생들도 12시가 가까워질 무렵 서전대야로 모여 들기 시작하여 광장에는 어 느새 3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 루고 있었다. 서전대야에서 독립선언식을 끝낸 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 진에 나섰다. 깃발을 든 학생대표가 제일 앞에 섰고 명동학교 악대가 그 뒤를 따랐다. 태극기 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군중들은 용정 일본총영사관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였다. 독립선언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언식을 지켜보고 있던 중국군 지휘관 맹부덕(孟富 德)이 갑자기 발포 명령을 내렸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벌이던 군중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중국 군의 총에 맞은 사람들을 제창병원으로 급히 옮겨 응급치료를 하였으나 14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 었고, 많은 사람들이 심한 총상을 입었다. 6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서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을사늑약의 원흉으로 조선통 용정시 3.13만세운동 오층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