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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순국 선 열 길 따 라 얼 따 라 109 奎) 등과 함께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서시>, <별헤는 밤>, <무서운 시간>, < 또 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 서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 년 쿄토에 있는 동지사(同志社) 대학의 영문과 에 입학한 후 동지인 송몽규·장성언(張聖彦) 등과 만나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을 담은 시작품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 을 하는 한편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는데 힘 썼으며 민족문화의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1944 년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 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 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의 요람지, 서전서숙 항일애국지사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용정의 한 인들의 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사재를 털어서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유교식 서당교육을 탈피한 신교육을 도입한 첫 번째 학교였다. 이상설은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비밀리에 가산을 정리하고 1906년 4월 18일 일본경찰의 감사 를 피해 이동녕, 정순만 등 동지들과 함께 중 국 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 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민족계몽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상설은 북 윤동주 생가, 용정시 명동촌 용정 대성중학교 윤동주 기념관과 시비 서전서숙 터 기념비(용정시 실험소학 운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