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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수평 마을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천수평에 주둔 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이범 석이 지휘하는 연성대를 선두로 북로군정서군은 천수평 외곽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군 기병중대는 독립군이 아직도 100리 밖의 청산리 부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토성 안에 말을 메어놓고 민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일본군 기병 중대가 자고 있 는 촌락과 토성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며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총소리에 놀란 일 본군은 허둥대며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북로군정서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전 투에서 일본군 4명이 말을 타고 탈출한 이외에 27연대 소속 기병중대 전원이 몰살당하였다.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이 거둔 승리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전투였다. 10월 22 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도구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고지 남측에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함께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인 전투였다. 아즈마 대장의 총지휘부가 있는 어랑촌 은 천수평에서 20여리밖에 되지 않았 다. 천수평에서 도망친 패잔병들에게 급보를 들은 아즈마는 기병제 27연대, 포병 제 25연대, 보병 1개 대대까지 출 동시켜 공격해 왔다. 김좌진 북로군정 서가 아즈마 대공세를 어렵게 막아내 고 있을 무렵 우측 산마루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나면서 왜놈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완루구 전투를 마치고 안 도현으로 이동하던 홍범도 부대는 어 랑촌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곧바로 부대를 돌려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어랑촌 전투는 어랑촌 일대에서 10월 22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북로군정서군 약 600명과 홍범 도 연합부대 700명이 아즈마 지대의 기병연대와 보병연대가 연합한 1,500명 내외의 병력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독립군들은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굶주리며 격전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는 한인동포들의 도 움에 힘입어 어랑촌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어랑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와 대 한독립군은 그 여세를 몰아서 천보산 전투, 고동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난과 역경으로 길고 도 험난했던 항일독립전쟁 청산리 6일 전투를 끝내고 안도현 황구령으로 철수하였다. 어랑촌 전투유적지, 길림성 화룡시 어랑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