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page

10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일송 김동삼은 신흥학우단 385명을 이끌 고 통화현 소북차(小北岔 )에 군사기지인 백 서농장(白西農庄)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 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 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정부와 주 민들을 의식하여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 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 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 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 1919년에는 3·1 독립시위운동의 영향 으로 한족회 내 서로군정서가 이끌고 있 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 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시설만으로는 학생 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한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 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대두자로 신흥학 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 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 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교세를 확장했다.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대한군정부(대한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가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 는 북로군정서에 연성사관학교를 설립하자 서로군정서 이상룡과 김동삼은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 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 생들은 1920년 10월 북간도 화룡현에서 전개된 청산리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와 같이 신흥 백서농장 유적지, 유하현 팔리초 소북차 청산리 대첩기념비,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청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