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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3 신민회와 신흥무관학교의 본거지 1907년 4월 서울에서 신민회가 비밀리에 창립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발기로 애국지 사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 (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 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 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 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 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 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 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할 비 밀결사 단체를 창립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 군 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2월에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유하현 삼원포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 선으로 채택했다.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 고 ,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 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서간도에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세우다 이회영(李會榮)의 여섯 형제가 가산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한 후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 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이회영 6형제는 조선말 귀족의 명예와 부귀영화도 버리 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한편 1911년 1월에는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李 相龍), 김대락, 김동삼, 류인식, 이원일, 박경종, 황만영, 허겸, 이규동, 조만기, 강신종, 배승환, 박 상진 등 이들 대부분이 종손들로서 수천석의 부호들이며 그 일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 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혁신유림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1911년 겨울에 서간도로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 신민회 창설을 위한 비밀회의를 열었던 상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