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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순국 선 열 길 따 라 얼 따 라 99 혁명당·조선혁명군·국민부의 조직을 정 비하였으며, 양기하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고,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 이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양세봉이 맡아 당·정·군의 조직을 재건하면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1931년 만주를 침략 한 일본군은 서간도 일대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양기하 선생은 1932 년 2월 관전현 하로하 연강에 주둔하고 있다 가 조선총독부 초산(楚山)경찰서 경찰대와 만주군의 협공을 받고 격전 끝에 조선혁명군 부하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육군주만참의부 고마령 전투유적지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 최석순 장군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대일항전 전략과 국내진공작전, 그 리고 참의부 무장투쟁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서 집안현 고마령 깊은 산중에 모여 작전회의를 개최하 였다. 1925년 3월 16일 새벽,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초산(楚山) 경찰대와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전투 가 벌어졌다. 깊은 산중에서 비밀리에 회의를 열던 중이었기에 갑작스런 기습에 전력을 다해 항전했 지만 참의장 최석순 장군을 비롯한 29명의 간부들이 희생되었다. 고마령 전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군의 역사의 현장이며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큰 피해로 기록되고 있지만, 유적 지에는 우거진 잡초만이 그 당 시의 참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의 부 독립군 장령 29명이 순국한 고마령 전투 유적지에는 오늘 도 기념비커녕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양기하 선생 순국유적지. 관전현 하로하 연강 사도구 전경 고마령전투 유적지 입구 : 길림성 집안시 대 로진 고마령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