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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31일 화요일 6 (제202호) 특집 개천절을맞은지난3일봉행된공효공묘제에150여성손이참례하면서집행부는투명한종사운영으로종원들과소통할것이라며화답한다.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어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得失) 을 논하여 아들들에게 경계토록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자신 을 경계하기도 하여 대대로 명현 석학을 배출하는 단초를 제공한 공효공(휘 중손) 의 묘제가 개천절을 맞이한 지난 10월 3일 경기도파주시탄현면오금리선영에서있 었다. 이날 제향에는 코로나 이후 처음 150여 성손이 함께하면서 성황(盛況)을 이루어 집행부의 사기를 고무(鼓舞)시켰다. 이는 그동안 박성훈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에서 투명한운영과송사배제를통한내실을다 지려는노력에종원들이화답한것으로어 느때보다진지한모습을보였다. 오전 11시부터 봉행된 묘제에는 세우 (世瑀,송월당공后)상근부회장의집례로 홍래(弘來,지평공后)고문이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상일(相佾, 문도공 后) 이사의 독축에 이어 운학(雲鶴, 화록공 后) 대의 원, 홍규(洪圭, 참군공 后) 대의원이 아헌 과 종헌으로 헌작한 가운데 상룡(商龍,공 간공 后) 대의원, 종팔(鍾八, 별좌공 后) 대의원이각각좌집사와우집사를맡아제 례를도와질서정연하게40여분에걸쳐봉 행되었다. 공효공은1412년(태종12)1월에정자공 의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 부제학공의 가르침을받고성장하였다.공의출생에는 어머니 고려 왕씨(王氏)의 태몽이 회자된 다. 모부인(母夫人) 왕씨(王氏)께서는 부 군(夫君) 정자공(正字公븡벼슬이름)에게 말씀하시길, 뷺제가 간밤에 꿈속에서 소 (牛)를 보았는데 그 소가 어찌나 컸던지 마치 집채만큼이나 커 보였으며, 그 소가 대문 안으로 들어설 적에는 대문이 다 좁 아 보였습니다.뷻라면서 마음 속으로 하도 이상한 나머지 꿈 이야기를 말 하니, 이 말 을들은부군정자공께서는한동안이나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다가 대답하여 말하길, 뷺아마도 부인의 꿈은 태몽(胎夢) 일게요. 장차 그 집안이 창성하려면 그 징 조(徵兆)가반드시먼저비치는것이거늘, 내생각으로는아마도부인께서아이를갖 게 된다면 장차 그 아이가 커서 우리 가문 을크게중흥시킬것이요.뷻라고하였다. 그뒤로한달도아니되어과연왕씨부 인은곧바로임신을알게되었으나정자공 께서는우연찮게병을얻어자리에눕더니 병고(病苦)에 시달리던 정자공이 어느 날 부인에게 말하길 뷺부인께서는 이 다음에 아이를낳거들랑부디잘거두어키워주시 길 바라오.뷻라는 한 마디의 말을 남긴 채 숨을거두니1411년(태종븡신묘)말복을며 칠앞둔7월2일이요정자공의나이겨우2 2세였을때다. 이처럼기이한태몽을얻고태어난공으 로 인해 후손들은 명현석학이 줄을 이었 고, 가문 또한 번성하여 박성(朴姓)의 대 다수가곧공의후예이다. 1426년(세종8.병오)에생원시(生員試) 에합격하고이해가을에배위(配位)를맞 이하니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공조정랑 (工曹正郞)승조(承祚)의따님이다. 공께서는1435년(세종17븡을묘)4월7일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 (集賢殿博士)에제수되어벼슬에올라이 조정랑,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 서운 판관(書雲判官븡관상감)으로 발탁되어 장 영실(蔣英實)을 독려하여 경복궁 뜰에 혼 천의(渾天儀)를 간직한 흠경각(欽敬閣) 을 세우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제작하게하였다.세종대왕의특명이 기도하였다. 이후 요직을 거쳐 1456년(세조 2) 2월 4 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오르 고 형조(刑曹), 예조(禮曹)판서를 역임한 후 1457년 3월에는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고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가 좌 참찬(左參贊)으로승차하였다. 1466년(세조 12. 병술) 5월 26일에 하세 (下世)하시니 향년(享年) 55세이셨다. 공 의 부음(訃音)을 접한 세조는 경순사상왈 공(敬順事上曰恭)이요자혜애친왈효(慈 惠愛親曰 孝)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부 조지전을 내려 제사토록 했다. 배위 남평 (南平)문씨(文氏)는 공의 묘소 곁에 나란 히쌍분으로모셨으니오늘날의경기도파 주시탄현면오금리계좌(癸坐)이다. 공의 묘소 앞에는 장명등(長命燈 사진 3)이 좌우로 두 개가 세워져 있는데,두 개 다고려시대의양식이라하며좌측의석등 (石燈)은 그 형상(形象)이 일월형각(日月 形刻)으로 조각되어 그 모양이 기이하고 이채로워2001년10월에정부보물제1323 호로지정보호하고있다. 한편규정공파대종회는지난달23일신 라시조대왕 추향대제에 임원진에 대거 참 례하여선조에음덕에감사하고후손의도 리를다하고자하는예를다했다. 공효공(恭孝公,휘仲孫)묘제(墓祭) 봉행 투명한운영과송사배제를통한내실다지려는집행부성원으로이어져 규정공파대종회박성훈회장을비롯한임원진이지난달23일봉행된신라시조대왕추향대제에참례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1540년 입향조 양오공께서 예학을 강론 하고 당대의 사대부들과 시류(時流)를 논 했던 휘구정(喜懼亭)이 오랜 세월을 견디 지못해소실되었다가1988년중건된이후 이제는 주민들에 의해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역주민들과길손을붙잡는다. 희구정이 있는 고창군 고수면 장두마을 은최근마을가꾸기사업의일환으로희구 정주변의바닥을걷어내어대리석으로깔 고환경개선과안내표지판을세워마을의 명소로만들어가고있다. 특히 안내 표지판은 본보 상섭 국장이 글을 짓고 이를 큐알 코드에 새겨 청소년 들이쉽게알아볼수있도록했다. 대대로 밀양(密陽) 사포리(현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 살았던 밀성박씨 은산 부원군후순찰사파춘파공문중이고창에 세거한 것은 무오사화가 계기가 되었다. 양오공의 아버지 춘파공(春坡公, 휘 윤추 또는 신추)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정여창등과도의지교로사귀었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여 정사가 어지럽고 방탕 한 생활로 이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 (鄕里, 밀양)로 돌아와 후생(後生) 계도 (啓導)에전념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은 신진사류가 대거 포진한 사간원의 지적이 담겨진 상소로 이어졌고, 이를 틈타 유자 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는 김일손(金馹 孫)이성종실록을편찬할때스승김종직 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 에실은것이이극돈을통하여연산군에게 알려지면서 무오사화로 이어졌고,연산군 이생모인윤씨폐위및사사사건당시이 를주장한사람이거나방관한사람들을모 조리찾아내어죄를묻게되는갑자사화로 이어졌다. 이과정에스승인점필재와그의문인들 인 일두, 한훤당 등 많은 제자들이 화를 입 게 되었다. 이에 양오공은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가일어나자아버지와함께가 솔을 데리고 전남 무안에 은거하고 본관을 면성인(綿 城人)으로 하여 살 다가 다시 고창 추 산봉 산양동(山陽 洞,현 고수면 초내 리)에 은거(隱居) 하게되었다. 양 오 공 의 어머니 태 인 박 씨 의 족보를 보면 지금 도 금성인 으로 기록 되어 전하 고 있음은 무 오 · 갑 자 사 화 를 피하기 위 해 철저히 신분을 속 였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태인박씨는 증 이조판서휘종원의따님으로감사원이뽑 은 조선시대 3대 청백리의 한분이신 아곡 박수량선생의누이이기도하다. 양오공의 휘(諱)는 서봉(瑞鳳), 자(字) 는 성봉(聖徽)이며 양오(陽梧)는 아호이 다.공은 용모(容貌)가 단정(端正)하고 기 개와도량이남보다뛰어나게슬기롭고총 명하여 훈화(訓話)를 들으면 다 기억(記 憶)하고 선행(善行)을 보면 다 모범(模 範)하였다. 8세에 입학(入學)하여 부지런히 독습 (讀習)하며 효행(孝行)하였고 겨우 15세 때 경전(經傳)의 깨달음이 빠르고 학문이 뛰어나 성종 계묘(成宗癸卯,1483년)에 진 사(進士)하고 익년(翌年)에 등과(登科) 하여 박사 전적 도사 익례 필선 동지중추 (博士典籍都事翊禮弼善同知中樞)등을 역임(歷任)하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 察使)가 되었으나 노친(老親)을 모시기 위해사직상소하여고향으로돌아와아버 지춘파공을간호함에있어밤잠도안자고 정성을 다하여 큰 효험이 있으니 모두들 그의효도(孝道)를칭찬(稱讚)하였다 으슥하고좁고쓸쓸한곳을찾아초가수 간(草家數間)을 지어 매일 소학심경 근사 록(小學心經近思錄)등을 읽고 역리(易 理)를 탐구(探求)하여 예설(禮說)을 강론 (講論)하고 심의제도(深衣制度)를 초록 (抄錄)하며때로는구름이걸쳐있는듯물 과돌이어우러진아름다운자연의경치를 찾아 소요(逍遙)하면서 쌓인 회포(懷抱) 를 달래었다. 특히 선생이 심의제도를 실 상에맞도록간추려기록하여보급한것은 아마도예학의대가사계김장생선생보다 앞선 것으로 예학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 다. 친상(親喪)을 당(當)해서는 초종범절 (初終凡節)을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의(衣)하고 3년 동안 애통(哀痛)함이 언제나 초상(初喪)때 같았으며 제사(祭 祀)에 여재(如在)의 정성(精誠)을 다하니 고창출신의 유학자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인이었던 인천 변성온(仁川 卞成溫)과 곤암 변성진 형제가 종학(從學)하면서 흠 모(欽慕)해마지않았다. 전북고창‘휘구정’주민들에의해새롭게 태어나 밀성박씨춘파공의아들양오공이예학을논했던곳 희구정,전북고창군고수면장두마을 큐알코드,청소년들을위 해자료를큐알코드에담 아함께새긴다. 희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