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3년9월30일 토요일 12 (제201호) 기획 율촌박배(栗村朴培,1504-1574)선생을당대호서지역의상징적인서원으로위상이특별했던「화양서원통문,華陽 書院通文」(18 58년정월)에서“아름답고아름답도다!율촌박공의큰도덕과뛰어난학문이며순실(純實)한효도와곧은충성과사우 의연원과출 처의시종등이능히장장히넉넉히사문의백대사표가되나니우리들의존모함이귀향과다름이없다”고칭송하고 있다.선생의 효행으로말한다면정성스런효도는절륜(絶倫)하여3년의여묘(廬墓)살이에날마다세번씩묘지앞에가서곡을하 였고,비와눈 이온다고해서그치지않았으며,도학(道學)으로말을한다면친히금서재(琴書齋,휘광보)와필재( 齋,휘광우)등 두종숙부의 정훈(庭訓)을받았고,충암김정선생과규암송인수선생의문하에서강마(講磨)하여드디어대유(大儒)를이루었고 ,세상에숨어 살면서도고민함이없었으며,알아주고장려함으로말하면율곡이이(栗谷李珥)先生께서조정에포장을천거하여세 자익위사좌 위수(世子翊衛司左衛率)가된큰선비이다.태악서원에배향되어그의도학의바름이백세에모범이되어소개해본다 . 尙州朴氏는朴彦昌을관조로모신다.박언창은신 라 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3)의 아들로 두 번째로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졌으므로 인하 여 본관을 상주(상산)로 삼았고, 그의 임무는 초적 (草賊)및후고구려(後高句麗)와후백제(後百濟)의 마수(魔手)로부터 사벌주(沙伐州)를 방어하는 것 이었다.현재상주(尙州)지역인沙伐州를食邑으로 하사받았으나, 후백제의 침략으로 본국[신라]과의 교통이 단절되자 919년(경명왕 3) 後沙伐國을 창립 하였다.그러나후사벌국은지속적으로침략해오는 후백제와힘겹게항쟁하다가929년(경순왕 원년)에 결국 패망하였고, 이때 대군 또한 전사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리고 경명왕의 아들 중 유일하게 유해가 안 장된 봉분(傳沙伐王陵,경북 기념물 제25호, 경북 상 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44-1 소재)이 전해지므로,매 년음력9월25일전국각지의후손들이모여대제를 봉향하고있다. 사벌국왕의아들휘욱(昱)은왕건을도와고려개 국공신이 되었고,12世 전하여 휘 려(侶)는 고려 25 대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상 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피봉 되었으므로 후손들 이 파조(찬성공파)로 모신다.파조 찬성공(휘 여)에 서부터 13세지헌(之軒,密直司左副代言典理判書) ·14세 돈((惇, 禮儀判書)·15세 양생(良生, 朝鮮時代 吏曹判書)까지의묘소가실전되었고,16세유(濡,司 憲府監察, 文化縣令, 大司憲)·17세 정지(貞地, 內資 寺僉正)·18세 증( ,繕工副正)의묘소가파주시조 리읍오산리오리동에있었으나실전되었다.그러므 로1954년4월12세朴侶에서부터18세朴 까지 7 위를 청원군 강외면 쌍청리 막상동(內棠甘 咸朴山) 에경모단(敬慕壇)을설치하고碑를세웠다.그리고 1982년 10월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 산73-6으 로 경모단을 옮겨 증설하면서,22세 박응란(朴應蘭, 漢城左尹)까지8위를함께모신다. 찬성공(휘 侶)의증손15세 휘 양생(良生)은 아들 유(濡)와 두 딸을 두었는데,큰 사위가 전조생(田祖 生,1318~1392,본관;潭陽,자;季耕,호;耕隱,욹 隱 田祿 生의 아우)이고,둘째 사위는 조선 초기에 예조참의 (禮曹參議)를 지낸 은장손(殷長孫)이다. 은장손으 로 부터 <殷長孫-女 金有聲-子 淑精-女 申瑛-子 弘 緖-子 欽(象村, 平山申氏)>과 <申瑛-女 金繼輝-子 長生(沙溪, 光山金氏)>으로 연결되어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문중과혼인관계를맺었다. 16세 박유(朴濡)는 사헌부감찰과 문화현령을 지 냈고 대사헌까지 올랐다. 그의 세 아들[寅地·亨地· 貞地] 중 셋째 박정지(貞地, 通禮院贊儀)의 자손들 이청주지역에서세거하였다.박정지의큰아들증( , 繕工監副正)의 큰 아들이 박윤문(朴允文, 1475~ 1540, 자;德章, 호;玉谷)으로 율촌 박배의 부친이다. 상주박씨로 맨 처음 청주 지역에 묘가 조성된 사람 이 박배의 부친 박윤문이다. 옥곡공은 어릴 때부터 군자로서의 품행을 갖추고 문장과 경술의 종장(宗 匠)으로특히작문한詩가조선성종때徐居正등이 신라에서 조선초기까지의 詩文을 정선하여 모아 엮 은『東文選』에수록되어있다.1519년己卯年賢良科 에천거되어處士로서벼슬이通政大夫副護軍에제 수되었으나,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며 벼슬을 버 리고 고향 坡州에서 남쪽 淸州로 내려와 거주하니 그의 나이 46세였고 아들 율촌 박배의 나이 16세였 다. 박배(朴培)는 16세기 초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 고 학문에 전념했던 은사(隱士)로서, 자는 익지(益 之)이고, 호는 율촌(栗村)이다. 그는 1504년(연산 1 0)에출생하여1574년(선조 7)에 71세의 일기(一期) 로 타계함으로써, 사림들이 훈구세력과(勳舊勢力) 과 맞서서 의리(義理)를 지키려다 화(禍)를 당했던 사화(士禍)의 시대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이를 피 해 청주(淸州)로 은신(隱身)하였다. 아버지 옥곡공 (휘 允文)과 어머니 현풍곽씨(玄風郭氏)와 율촌 박 배(朴培) 선생과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소 는 오송읍 상봉리 산5[毛詩洞]에 조성되어 있으며, 그들과후손의재실이상봉리22에있다. 율촌선생은타고난자품이절륜하고총명하고지 혜로웠으며나이겨우13세에육경(六經)및백가의 모든서적에융통하여심오한뜻과정미하게온축된 것을환연히풀지않음이없었다. 충 암 ( 庵) 김정(金 淨, 1468~1521) 규암 송인 수(圭庵 宋麟壽, 1499~1547) 선생으로 더불어 도의 (道義)로 교제를 하였고, 덕성(德性)을 훈도(薰陶) 하고 경리(經理)를 탐구(講究)하였으며, 해를 넘겨 서 돌아가서 금서재 박광보(琴書齋 朴光輔)와 필재 박 광 우 ( 齋朴光佑)두종숙부를모시고책을들 고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날이 새고 밤이 늦 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두 분께서 일찍이 장려해서 허여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율촌의 모습을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는 “명문 의 자제로 재주는 높고 기질은 아름다우며 학문은 넓고 들은 것은 많으며, 그의 선군 옥곡공(玉谷公) 의 문장을 계술(繼述)하고 그의 백종숙 금서재(琴 書齋)의 예학을 익히고 계종숙 필재( 齋)의절의 를 싫도록 들어서 그들을 사모하고 본받음으로 몸 (體)를 이루었으니 문정(門庭)의 가운데서 그의 학 행이나온것이다.시속(時俗)의선비로누가이보다 낫겠는가”라고칭송하였다한다. 율촌 선생은 타고난 풍취(風趣)가 절륜(絶倫)하 고학문을일찍성취하였으므로,총명하고지혜로웠 으며 공경하고 순실(純實)하였다. 도리(道理)로 담 론(談論)해서 일찍이 사문(斯文)의 준칙(準則)이 되었다.나이겨우13세에육경(六經)및백가(百家) 의모든서적에융통(融通)하여심오한뜻과정미하 게 응축된 것을 환연히 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고 도오히려스스로를믿지못하여말하기를,“나는앞 으로道가있는곳에바르게설것이다.”라고하면서 도덕적(道德的) 의리(義理)를 학문과 처세의 좌우 명(座右銘)으로삼았다. 율촌 선생의 교유와 학문에 대하여 손자 휘 정란 (廷蘭)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世上에 뜻을 끊고 권요(權要)를쫓지않았으며,말은공리(公利)에미 치지 않았고 숙학(宿學)이 이미 넉넉하였지만 더욱 노력을 많이 하였으며, 절차(切磋)한 功이 즐기는 자의영역에흡족히도달하였으며,본원(本源)을깊 고 굳게 해서 정축(渟 )하고 넉넉하였으니, 이에 충암 김선생( 菴 金先生)과 규암 송선생(圭菴 宋先生)으로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제(交際)를 하 였다.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하고 경리(經理)를 강구(講究)하였으며, 해를 넘겨서 돌아가서 금서 (琴書)와필재( 齋) 두 종숙부(從叔父)를 모시고 책을 들고 어려운 문제를 문의하였는데, 날이 새고 밤이늦는줄을알지못하였다.그러므로이공(二公) 이 일찍 장려해서 허여(許與)하지 않음이 없었다.』 라고교유관계를요약하였다. 충암 김정( 菴金淨,1486~1521,본관;慶州,호; 菴·孤峯, 시호;文貞)은 보은 출신으로,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514년에 순창군 수가되었다.이때왕의구언(求言)에응해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본관;忠州,호;訥齋,시호;文簡) 과 함께 억울하게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愼氏)의복위(復位)를주장하고,아울러신씨폐위 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 을상소했다가왕의노여움을사서보은에유배되었 다.1516년석방되어형조판서에올랐으나1519년기 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 필 등의 옹호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신사무 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중죄에 처해져 사사(賜 死)되었다.1545년(인종1)복관되었고,1576년(선조 9)문간(文簡)의 시호를 받았으며,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추증되었다.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1499~1547, 본관;恩津, 시호;文忠)은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 문관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 치 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그러 나김안로의재집권을막으려다오히려그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 었다. 이때 송인수는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는 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 (泗川)으로 유배되었다.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 하자 풀려나 대사헌까지 올랐는데, 윤원형(尹元衡) ·이기(李 潭 )등의미움을받아1543년전라도관찰사 로 좌천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윤 원형을탄핵하였다.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 성부좌윤에 있다가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던 중 사사되었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 다. 율촌 선생은 충암 김정과 규암 송인수보다 8살, 5 살 연하이지만 사화 이전에 서로 젊은 나이부터 도 의(道義)로교제하였다.율촌선생이이들과교제하 면서학문적인전수는물론이고,절의정신을본받을 수있었을것으로생각된다.충암이1521년에사사되 었으므로, 율촌과 만날 수 있었던 기회는 충암보다 규암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규암은 을사사화 이후청주에약2년정도은거하였기때문이다.그렇 기 때문에 규암 송인수는 율촌에 대하여 좀 더 자세 히 알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규암이 율촌에 대 하여 『익지(익지,栗村 朴培)는 名門의 자제로 재주 는 높고 기질은 아름다우며 학문은 넓고 들은 것은 많으며, 그의 선군(先君, 아버지) 옥곡공(玉谷公 휘 允文)의 문장을 계술(繼述)하고 그의 백종숙(伯從 叔)인금서재(琴書齋,光輔)의예학(禮學)을익히고 계종숙(季從叔)인 필재( 齋, 휘 光佑)의 절의를 싫도록 들어서, 그들을 사모하고 본받음으로 體를 이루었으니門庭의가운데서(그의學行이)나온것 이다. 속유俗儒)와 시사(時士)가 누가 이보다 낫겠 는가라고칭송하였다고한다. 즉 규암은 율촌이 울연(蔚然)히 사원(詞垣)의 종 장(宗匠)이되어세상에크게떨친부친의문장과경 술(經術)을 이어받았고, 伯從叔父 琴書齋 朴光輔의 禮學을전수받았으며,季從叔父 齋朴光佑의절의 정신을계승한것으로문중의영향을받았다는사실 을더높이평가한것이다. 율촌 선생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지나면서 충 암과 규암, 그리고 종숙부인 필재가 입은 화를 목격 하고,세상에진저리나는염증(厭症)을느꼈을것이 다. 율촌은 기묘사화 이후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기 를,“나는 이미 세상과 더불어 멀어졌다.”라고 하고, 청주 서쪽 (동림산)에 은둔하여 집에 ‘栗村’이라는 편액을달고이를號로삼아유유자적하면서초야에 묻혀생활하였다. 율곡 이이가 1571년(선조 4) 청주목사(淸州牧使) 로내려와서67세였던율촌의행의(行誼)를듣고선 조(宣祖)에게 계달(啓達)하여 처음에 병절교위(秉 節校尉)를 제수하였고, 이어서 세자시강원 익위사 좌위수(世子侍講院翊衛司左衛率)에제수하였다. 금곡 송래희(錦谷 宋來熙, 1791~1867, 자;子七, 본 관;恩津)는 율촌의 학행과 생애에 대하여 자신이 쓴 묘갈명(墓碣銘, 幷書)에서 『가정을 다스림은 禮로 하였고,처세(處世)는 기미(機微)를 살폈으며,학문 이 넉넉하였지만 자신을 믿지 않았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걱정이 없었다.공을 벗한 자 누구이고,공을 천거한자 누구이던가?이로써공을 본다면거의 알 것이다.』라고높이평가하였다.즉율촌이생존했던 시기에道義를굽히지않은節義의인물로평가되는 충암 김정과 규암 송인수와 교유하였고, 퇴계 이황 과함께조선성리학의거두(巨頭)인율곡이이가천 거한율촌의학문적위상을대변하였다. 태악서원은 기호서사(岐湖書社, 1710년 창건, 세 종시 나성로 96[나성동 101])에 제향되었던 세종 때 의 명재상 방촌 황희( 뵀 村 黃喜, 1363~1452, 본관;長 水, 시호;翼成)의 위패를 이봉(移奉)하여 1856년(철 종7)연동면명학리119에창건되었고,2년후인185 8년(철종9)율촌 박배(栗村朴培)선생을추배하였 다. 율촌선생의태악서원추배에대한논의는태악서 원 창건 이듬해인 1857년(철종 8)부터 시작되었다. 율촌의추배를주도한인물이누구였는지확인할수 없으나,가장(家狀)을발견한박용래와가장을문중 에 알린 박형중 등 상주박씨 인물들이 연기향교 유 림들과함께추진했던것으로짐작된다. 1857년 12월에 율촌 선생의 서원제향을 지지하는 청주향교, 회덕향교, 공주향교, 문의향교의 통문이 연기향교와태악서원에전달되었고,1858년(철종9) 정월에는화양서원에서도“율촌박공의대도(大道) 와 절학(絶學), 순전한 효도와 곧은 충성, 사우(師 友)의 연원,출처의 시종(始終)등이 능히 명백하고 아름답게사문의백대사표가되니우리들의존모함 이 귀향과 다름이 없다.”라고 칭송하는 통문이 전달 되었다. 그리고1857년12월25일에는연기태수에게「태악 서원유생상연기졸품목(台嶽書院儒生上燕岐 稟 目)」을 올려 12월 26일에 태악서원에서 사론(士論) 을 모아 추배를 결정하기로 하였음을 전달하였다. 그리고이듬해인1858년3월20일에는열읍유생들이 삼계 조병덕(三溪 趙秉悳, (1800∼1870, 본관;楊州. 호;肅齋,시호;文敬)에게글을올려추배제향에도움 을요청하였다.이에조병덕은사론(士論)에따라태 악서원유생들에게「삼계조공답태악사유생서(三溪 趙公答台嶽祠儒生書)」·「태악사률촌추배시익성공 황선생위고유문(台嶽祠栗村追配時翼成公黃先生 位告由文)」·「태악사추배봉안문(台嶽祠追配奉安 文)」과「春秋享兩丁祝文」을지어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58년 3월 말경에 율촌 선생 이태악서원에추배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그러나 태악서원은 창건 후 15년이 지난 1871년 (고종 8)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현 재 태악서원의 유지(遺址)는 상하 2단으로 층을 이 룬 밭으로 개간되었고, 중간에 두둑을 쌓아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서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이다. 주민(長水黃氏라 함)의 전언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남아있던비석을두둑에묻었다고한다. 상주(상산)박씨인율촌박배(栗村朴培)선생은1 6세기 초중엽 권세가들에 의해 사림들이 禍를 입었 던기묘사화와을사사화가일어날때도덕적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주 동림산에 은거했던 은사(隱士)로 서, 연기 태악서원에 방촌 황희에 이어 추배된 인물 이다. 어린 나이에 학문을 성취했던 박배의 도덕적 의 리는 부친 옥곡 박윤문(玉谷 朴允文)과 두 분의 종 숙부(從叔父) 금서재 박광보, 필재 박광우의 학문 과 절의를계승하였고,교유관계에 있었던충암 김 정과 규암 송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청주목 사로부임했던율곡이이는율촌의행의를듣고선 조에게 계달하여 병절교위를 제수하였고, 이어서 세자익위사좌위수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 다. 상주박씨는본래파주지역에서세거하였지만,사 화를피해19세박윤문과20세박배가청주지역으로 이거하여 그의 후손들이 점차 청주 주변 지역[증평 율리, 강외면 일대(현 오송읍), 연기(현 세종시), 공 주봉정]에산재하여세거하고있다.이들지역에세 거하는 상주박씨는 청주 주변의 다른 유력 성씨와 혼인관계를 통하여 사림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 서상호유대를강화하였다. 특히 박배의 부친 박윤문이 현풍곽씨와 혼인하면 서 처향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림산을 중앙 에두고서쪽이오송읍이고동쪽이옥산면금계리인 데, 금계리에 있던 곡수서원에 배향된 44명의 인물 중에 박윤문의 처조부와 같은 곽신(郭信)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박광보의 묘소가 오송읍 고로리에 위치하는데, 고로리[현 오송읍 상 정리 呂村말]에 박광보 妻의 성씨인 咸陽呂氏가 세 거한사실과같다.함양여씨는1619년(광해11)에고 려 말 이곳으로 낙향한 정평공 여칭의 위패를 봉안 한정평사를건립하였다. 박배의 후손들은 문장과 도학의 본보기였고 덕업 과문망의종핵(宗核)이될정도로많았던玉谷과栗 村 父子의 문헌이 兵火와 후손들의 쇠잔(衰殘)으로 보존될 수 없었던 사실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30세 朴鏞來가 1852년 공주 아리현[현 공주시 봉정동]의 宗人집에서22세정란(廷蘭)公이지은율촌의家狀 을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율촌의 도의와 학문에 대 한 추숭작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도 종중에서는 ‘상주박씨 찬성공파 문중 사현록’등 을발간선조현창사업에매진하고있다. 율촌의종숙부금서재와필재형제는道學과名節 로서 원우에 배향되었으나, 율촌은 일문의 현자로 幽光과隱德이후세에들림이없으니후손들이이에 대한 한을 품고 있는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하였 다. 따라서 옥곡과 율촌의 행적을 來世의 龜鑑으로 삼을것을여러종인들에게전하고자하였다. 청주를중심으로주변지역에형성된상주박씨박 배후손의주된세거지는증평율리,오송읍과,공주 봉정 등 세 곳으로 집약되었다. 1858년 박배가 추향 되는태악서원은상주박씨세거지의중간지역에해 당된다.태악서원에서오송까지의직선거리가13km 이고,나머지세거지사이의직선거리는24km에서3 2km정도였다. 율촌이 태악서원에 추배된 것은 1858년 3월 말경 이다. 태악서원 추배에 힘썼던 인물은 확인할 수 없 지만, 가장을 찾았던 율촌의 10세손 박용래와 가장 을 찾은 사실을 주변의 문중에 알렸던 8세손 박형중 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연기향 교와 태악서원 유림들이 인근 향교의 지원과 삼계 조병덕의도움을받아율촌을추배할수있었다. 상주박씨는청주인근지역의하루일정의거리에 세거하면서, 금서재와 필재, 그리고 율촌까지 서원 에배향하여청주일대에서유력한사족으로서의지 위를확보하게되었다. /자료출처태악서원학술대회곽호재(충남도립대 학교)율촌박배의생애와학문) 도학의바름이백세에모범이 된율촌 박배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家系)와생애(生涯) 옥곡(玉谷)박윤문(朴允文)상(上)·율촌(栗村)박배(朴培)선생부자의墓:청주시흥덕구오송읍상봉리산5 율촌선생묘비,승정원동부승지겸경연참찬관송래희(宋來熙· 1791∼1867)선생이비문을지었다. 교유(交遊)와학문(學問) 태악서원추배(追配)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