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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 단상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2일 개성, 3일 예산 등으로 이어졌고 19일에는 괴산, 21일에는 제주까지 이어져 전국 13도에 골고루 파급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불교계에서도 서울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지방까지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한용운은 2월 28일 밤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아 수개월동안 준비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을 설명하고 3천여장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이날의 참석자는 김봉신, 신상완, 김대용, 오택연, 김법린, 박민오등이었다. 한용운은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고, 이를 시내에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한용운의 밀명을 위해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였다.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 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서울에 남아 연락망 및 지휘를 맡았다. 각 지방을 담당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서울 시내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몸에 소중히 간직하고 그날 밤 각 지방의 사찰로 향하여 그 지방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정병헌은 구례화엄사,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 김법린,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담당하였다. 양산의 통도사 방면은 이 사찰 출신의 오택언이 불교중앙학림 대표로 내려왔으며, 그 때가 3월 5일 이었다.